세계관은 한 번의 글쓰기로 모두 말할 수 없으니, 여러번에 걸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할 주제는 '현실성'입니다.

장르소설에 왜 현실성이냐고요? 현실성은 필요없고, 답답한 현실에서 빠져나가고 싶어서, 대리만족을 위해서 장르소설을 보고 있다고요? 독자는 그래도 됩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면 안됩니다. 현실성이 없어야만 또다른 세계로, 판타지, 무협 세계로 빠져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현실성이 제대로 반영이 되어서,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해결해나가는 데에서 카타르시스가 발생합니다.

왜 현실성을 필요로 할까요? 왜 소위 말하는 고증을 그렇게나 따질까요? 그저 장르소설뿐인데 말입니다. 현실성을 따지려면 검기, 검강으로 쇠도 두부처럼 썰어버리고 손에서 불덩이가 나가고 얼음 덩이가 나가는 건 어떻게 볼 수 있냐? 라는 말도 많이 합니다. 이런 것들을 따지는 것이 현실성인 것이 아닙니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이 가진 현실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한 것들은 세계관 구축에 포함이 되는 것이고, 이 근간은 결국 '논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판타지 장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현실과 판타지의 공통점은 뭐가 있을까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말할 것은 종족과 시대입니다. 인류와 중세 시대가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인류부터 말하자면, 작가가 인간이라는 종족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작가가 보고 배운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성을 그대로 소설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장르소설과 현실성이 이상하게 겹치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서 엘프나 드워프, 오크 같은 이종족은 논외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족을 소설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실성, 고증 등이 필요해집니다. 인간이라면 무조건 하는 행동이 있다면 소설에 반영되어야 하고, 인간이라면 절대 안하는 행동이 있다면 소설에서도 그래야 하죠.

두번째로 시대에 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작가들 대부분은 중세시대 귀족들을 멍청하게 묘사합니다. 나름 지략가로 나오는 캐릭터도 그렇게 멍청할 수가 없습니다. 그 와중에 주인공 혼자 똑똑하게 묘사하긴 하는데, 그마저도 멍청합니다. 중세시대의 농노나 평민들은 멍청할수도 있습니다. 현대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는 아니니까요. 근데, 그저그런 평민과 얽히는 주인공은 없습니다. 평민과 얽히더라도 재산이 어마어마하거나,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거나, 무력이 어마어마하거나 어쨋든 무언가에는 뛰어난 평민이 나오는데, 너무 멍청합니다. 중세 배경의 글을 읽고 있으면 작가가 중세시대 사람들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정치체제, 배우고 있는 학문(철학, 과학, 수학 등) 모두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 거의 다 완성되었습니다. 과학같은 경우 기술의 발전으로 예전 이론을 반박하고는 있으나, 동일 기술로 과학을 탐구했으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이뤄놓은 학문적 업적은 현대에 와서야 진실/거짓이 밝혀졌거나, 아직까지도 뛰어넘지 못한 이론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판타지 장르는 현대에서 그냥저냥 살거나 아니면 거의 밑바닥 인생을 살고있던 주인공이 죽거나 소환되거나 강제로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는 설정이 많습니다. 근데 하나같이 말빨로 귀족들 속여 넘기고 이용해먹습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하리라 생각하는지는 둘째치고, 그렇게 시원하게 다 속여넘기는게 통쾌하고 사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라이벌이 시원찮아서 소설 전체가 시시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뭔 짓을 한들 그 짓은 매우 멍청할테니 주인공이 위기라고 작가가 아무리 묘사해도 크게 와닿지 않게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말하는 히어로물을 생각해보세요. DC의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마블의 인피니티 사가, 거기서 멍청한 악당이 있었나요? 특히 '조커'와 '타노스'는 정말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보여주었고,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 같은 진 주인공 느낌까지 납니다. 다크나이트와 인피니티 사가가 너무 진지해서 보기 힘들다는 사람이 있나요? 물론 있을 수는 있습니다만, 매우 소수일 것이고, 그런 의견이 지배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명작이라 칭송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일단 현실과 판타지의 다른 점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마나'입니다. 현실에는 없는 미증유의 힘이죠. 작가의 설정에 따라 마나는 기와 동일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건 설정하기 나름이니 일단 판타지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마나로 통일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이 '마나'라는 것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또다른 에너지입니다. 전기나 석유처럼 어떤 기계를 통해서 가공 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기계처럼 작동해서 몸 안에 마나를 품고 그 마나를 그대로 혹은 변환시켜서 사용합니다. 문제는 작가는 이 '마나'를 사용하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 없이 그냥 소설을 써내려갑니다. 그럼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판타지는 보통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데, 작가가 상상하는 주인공은 민주주의에 물들어 있고, 온갖 정보가 넘쳐나고, 평등을 부르짖는 현대인입니다. 이 현대인이 애매하게 중세와 합쳐져서 이도저도 아닌 주인공이 되어 버립니다.


'현실성'을 따지지 않는 것은 글을 힘들게 쓰고 싶지 않은 작가들의 변명일 뿐입니다. 현실성을 좇으면 글이 재미 없어진다? 그건 현실성을 반영하든 안하든 글이 재미없는 겁니다. 본인의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발전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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